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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1971년 7월 1일 제 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어린이들에게 꽃다발을 받고 있다. 뒷 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정희와 김대중<26>
1971년 7월 1일 오후 2시 박정희 제7대 대통령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지금의 경복궁 앞마당)에서 열렸다. 김종필 국무총리와 민복기 대법원장 등 국내 주요 인사, 스피로 T. 애그뉴 미국 부통령과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 등 각국 경축사절, 일반 시민 등 2,2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박정희는 취임사를 통해 평화와 번영, 조국 근대화와 국토 분단의 종식을 강조했다.
3기 집권 취임사를 압축하면 ‘1960년대 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마련한 기반 위에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시대를 열어 국력을 더욱 키우고, 변화하는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가 중진국 진입을 이루자’는 내용이다. 박정희는 “앞으로 중화학 공업시대의 막을 올리고” 수출입국과 농어촌 근대화를 이루어 “중진국의 상위권”으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김대중의 대선 공약이 상당 부분 반영된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사
취임사를 자세히 뜯어보면 앞선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제기했던 공약들과 상당한 정책적 접.을 보이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우선 도시와 농촌의 격차, 소득 불균형 심화 문제다. 박정희는 ‘도시와 농촌의 발전 격차를 줄이고, 소득의 상극적 격차를 해소하며, 건설과 생산에 피땀 흘린 우리 농어민과 근로자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김대중 후보의 대선 공약인 ‘공정한 분배의 법제화, 노동조합의 자주성, 최저임금제의 단계적 실시, 농촌경제의 발전 기초 위에 상업과 공업 발전’ 등의 주장과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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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정부가 이미 농어촌 근대화와 소득격차 해소를 주요 과제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을 감안하더라도, 대선 과정에서 김대중이 강하게 제기해 국민적 호응을 얻은 의제를 일정 부분 의식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972년 평양에서 열린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을 마치고, 양측 대표단과 수행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많은 논란을 불렀던 김대중의 ‘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 비정치적 교류, 단계적 평화통일’ 공약도 비교해볼 만한 대목이 있다. 박정희는 대선 과정에서 김대중의 4대국 안전보장론과 평화통일론을 위험한 주장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그런데 불과 두 달여 뒤 취임사에서는 국제사회의 ‘대화와 협조’ ‘공존공영’을 강조하고 특히 “미국과 중공(중국)의 화해 움직임”을 거론하면서 “분단된 조국을 평화로운 방법으로 하루속히 통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박정희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그해 남북대화에 나섰다.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가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여 8월 20일부터 판문.에서 접촉이 시작됐다. 이듬해에는 남북 당국 간 비밀접촉으로 발전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김대중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비교적 일찍 파악하고 시대를 앞서 의제를 선。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정희는 또 취임사에서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거짓·부정·사치·낭비”를 일소하고 “근면·검소·정직·성실”로 나아가자고 호소했다. 이는 김대중이 대선 공약에서 “부패·낭비·사치”를 지적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한 사회”를 강조한 것과 주요 어휘까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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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사회가 안고 있던 부패와 불평등, 산업화 과정의 사회적 병리에 대해 두 후보가 일정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경제정책·남북관계 문제의식 공유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극과 극'
두 사람은 7대 대선에서 서로 다른 관.에 서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대립했지만 경제·사회정책과 남북관계에서는 문제 의식과 정책 방향이 수렴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로서도 대선에서 다수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던 김대중의 의제를 일정 부분 흡수해 국정에 반영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남북문제에선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은 차이가 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서는 두 사람의 간격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차이는 더욱 선명해졌다.
박정희는 취임사에서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제도를 더욱더 다져 나가겠다”면서 “민주사회의 성장” “개방사회의 건실한 기풍” 등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동시에 “경제건설의 토양 위에서만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날 수 있다”고 못박았다.
두 사람의 차이는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우선순위와 인과관계에서 선명했다. 박정희에게 경제건설은 민주주의가 자라나는 토양이었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생활이 윤택해져야 민주주의도 발전할 수 있다는 인식이었다. 반면 김대중에게 민주주의는 경제와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한 제도적 토대였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의 선후관계를 놓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에 서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취임사에 이듬해의 유신체제 선포를 직접 암시하는 표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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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주주의보다 경제 건설을 앞세우고, 세계 질서의 대변혁에서 비롯되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가 결합되면서 이듬해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취임식 전후 국내외에서 잇따라 벌어진 중대 사건들은 박정희에게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했을 것이다.
박정희 3기 집권 시작된 1971년은 사회의 불만이 폭발적으로 분출
박정희의 3기 집권이 시작된 1971년 7월부터 1972년 10월 유신까지는 격동의 시기였다.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했고 박정희 정권 10년 동안 쌓인 모순과 불만이 도처에서 터져 나왔다.
1971년 7월의 ‘사법파동’도 그 하나였다. 7월 28일 검찰은 서울형사지법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에 대해 제주도 출장 중 변호사로부터 교통비와 숙식비 등을 제공받았다는 이유로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사건에서 영장을 기각하거나 무죄를 선고해 공안당국과 마찰을 빚어온 터라 법조계에서는 보복성 수사라는 인식이 강했다.
법원이 영장을 기각했지만 검찰은 다시 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이를 또 기각했다. 이에 반발한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이 사표를 냈고 지방 판사 153명도 동조해 사표를 제출했다. 파동이 박정희 정권에 큰 부담으로 번지자 신직수 법무부 장관과 이봉성 검찰총장이 민복기 대법원장을 찾아가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큰 후유증을 남겼다.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사건 당시 시민들이 관용차를 불태우고 있다. 성남시 제공
8월 10일에는 경기 광주군(현 성남시 수정구·중원구 일대)에서 주민 수만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이주정책과 졸속 행정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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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서울시의 무허가 판자촌 정리정책에 따라 청계천·영등포 지역 등에서 강제로 이주한 주민들은 당국의 무대책 속에서 생계를 위협받자 파출소를 습격하고 순찰차를 불태우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사태가 커지자 정부는 내무부 차관과 서울시장 등을 현장에 파견해 세금 감면과 일자리 마련, 생계대책 등 주민들의 주요 요구를 대폭 수용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박정희 집권기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가 낳은 사회적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려낸 철거민과 도시빈민의 현실과도 깊이 맞닿아 있었다.
북한 침투 요원들이 탈출해 총격전 벌인 '실미도 사건'
8월 23일에는 실미도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 침투를 목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으며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격리 수용돼 있던 부대 요원들이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했다.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진입한 뒤 영등포구 대방동 일대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대부분 사망했다. 부상을 입고 체포된 4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뒤에 사형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베트남에 파견됐던 한진상사 노동자들이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사무실을 。거하고 불을 지른 사건, 서울 동대문시장 상인들의 세무행정 시정 요구 집단 시위, 서울대 의학부 인턴들의 처우 개선 요구 시위, 대학교수들의 중앙정보부 간섭과 압력 중단 요구 등 수많은 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당시를 두고 “사회 구석구석에서 악취가 풍겼다. 자고 나면 사고요, 사건이요, 사태였다”고 회고했다('김대중 자서전' 1).
1971년 8월 24일자 한국일보 1면. 탈취한 버스에서 자폭한 실미도 부대원들의 모습이 실렸다.
여당인 민주공화당 내부에서도 이상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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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실미도 사건과 광주대단지 사건 등의 책임을 물어 치안 책임자인 오치성 내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당시 공화당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4인방(백남억 당 의장, 길재호 정책위 의장, 김성곤 중앙위원회 의장, 김진만 재정위원장)은 자파 의원들을 움직여 해임건의안에 동조하도록 했다.
여당인 공화당에서 나온 반란...중앙정보부 끌려간 의원들
10월 2일 국회 표결에서 재석 203명 가운데 찬성 107표, 반대 90표, 무효 6표로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여당에서 상당수의 반란표가 나온 것이다. 이른바 ‘10·2 항명파동’이다.
이 파동의 뿌리는 박정희의 장기집권 구도에서 배태됐다. 박정희는 3선개헌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던 김종필계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성곤 등 신주류 세력을 활용했다. 그런데 김성곤 등 4인방이 박정희의 세 번째 임기가 끝나는 1975년 이후까지 염두에 두고 세력을 키워가자 박정희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오치성 내무부 장관을 앞세워 경찰과 지방행정 조직에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고 4인방 계열 인사들을 대거 축출했다. 10·2 항명은 이에 반발한 4인방이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4선 국회의원을 지낸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 그는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으나 1971년 10·2 항명 파동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타당하고 수염이 뽑히는 수모를 당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격노한 박정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항명 주동자와 참여자들을 색출해 엄중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김성곤, 길재호, 강성원, 구태회, 신형식 등 관련자들이 줄줄이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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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0002627
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과제로 추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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